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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발전 모델 연구에서 멕시코 사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멕시코 농업은 1910년 혁명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고 프러시아형의 발전도 아니고 아메리카형도 아닌 독특한 '멕시코의길'(via mexicana)을 걸어왔다.  이러한 특수성과 더불어 연속된 실패의 경험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Bartra 1993;1974).  실패의 이유는 바로 멕시코의 농정이 혁명국가가 지향하고 있는 정당성 창출을 위한 토지 재분배란 목표(멕시코 헌법 제27조)와 생산성 제고라는 경제적 규범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는 데서 찿을 수 있다.

  1930년대 멕시코 까르데나스 대통령은 1917년 헌법의 제27조에 의거하여 그동안 미미했던 농지개혁을 대대적으로 실행하여 -지금은 폐지되었던-  멕시코의 공동경작제도 였던 에히도(Ejido)공동체를 창출하여 농본주의적 민중주의의 토대를 세웠다.  그러나 1940년대부터 1965년까지 정부가 추구해 온 '안정적 발전 모델'이 작동한 시기에는 주로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에 주력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940년대 들어와서 멕시코 정부는 주로 댐, 관개시설,도로,전력화 등과 같은 대규모 인프라 투자에 전력하고 대단위 경영형 농업 분야에 민간인 투자를 촉진하는 분위기를 유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조금 뒤에 전개되는 녹색혁명의 성과 그리고 신품종 개발과 결합하여 1960대 초 '멕시코 기적'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1963년 멕시코는 식량의 자급자족을 달성할 뿐 아니라, 곡물수출국으로 부상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20여년 간의 붐도 지리적으로는 소노라와 시날로아를 중심으로 한 북부 몇 개주에 국한된 것에 불과했다. 

  이 시기 치아빠스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앞에서도 간단히 보았지만 치아빠스에는 농지개혁의 성과는 지극히 미미했다.  1950년 당시에 고지대 인디오 공동체 다수가 토지의 절반을 에히도로 확보했지만 대부분의 토지가 지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한계지에 불과했다.  반면 치아빠스에서 양질의 토지가 집중되어 있는 오꼬싱고 지역, 그리할바 계곡, 그리고 소꼬누스꼬 지역은 대부분 대농장주나 목축업자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이 땅은 결코 수용된 적도 없고 원주민 인디오 농민들이 접근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농촌의 까시께들은 치아빠스의 지방정치를 주무르는 여당인 제도혁명당 간부들과 관료세력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 나갔고, 인디오 원주민들이 개발한 땅을 목축지 확장이나 새로운 환금작물을 위한 농장개발을 명분으로 자기 손아귀에 넣었다.  이들은 또 주의 금융기관과 유통망 그리고 수송수단을 장악하여 유통영역에서도 많은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그러나 치아빠스 인디오 원주민의 고통은 아무에게도 노출되지 않았다.

  1968년 멕시코 학생 데모대의 궐기는 바로 안정적 발전모델이 낳은 사회의 후유증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한 농촌사회의 심각한 불평등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멕시코 농업의 문제점도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징후가 1970년대 초에 멕시코가 주곡 수입국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이미 1960년대부터 옥수수와 콩과 같은 주곡을 생산하는 농가에서는 점차 근대적 목축이나 수수시럽 같은 사료작물로 대체해 나갔고, 멕시코 북부의 밀 생산자들은 수출용 과일이나 원예작물로 바꾸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옥수수와 같은 주곡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한계지에 전통적 영농법으로 경작되는 작물로 자리잡아 갔다.  주곡 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까시케로 알려진 지방 정치 보스들의 만행은 치아빠스주에는 유독 심하다.  좋은 예는 모또신틀라 시의 까시케 호르헤 펠리노 몬떼시노스를 들 수 있다.  그는 그 당시 여당인 제도혁명당의 하부기관인 전국농민연합(CNC)의 주 지도자로서, 그 지역 시장을 세 번 역임했고, 연방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시의 모든 교통수단을 통제했고 부인은 멕시코에서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지역 등기소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의 꼼파드레(compadre:대부)인 에르멜린도 한 로비에로는 세무서장이었다.  그의 동서는 실테빽 지역의 시장이었고, 조카는 라 그란데사의 시장이었고, 또 다른 꼼파드레는 엘 뽀르베니르의 시장이었다.   온 가족이 그 지역의 상징인 권력자로 군림했던 것이다.(Luis Hernamdea1996)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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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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