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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몇 연구자들은 인디오 치아빠스 사빠띠스따 봉기의 정치사회적 배경으로 '시민사회의 출현'을 들면서, "사빠띠스따의 봉기야말로 멕시코  정치체제가 이미 이전부터 직면해 온 정치적 위기 과정의 예정된 결과"라고 갈파한다(Martinez y Montesinos 1994: 40).   이 절에서는 지난 20년간 멕시코의 정치과정을 시민사회의 성장이란 측면에서 조명하면서 치아빠스 농민반란을 분석하고자 한다. 

   멕시코 시민사회의 출현은 대체로 1968년 7월 말 학생운동 사건을 기점으로 조명해 볼 수 있다.   시민사회의 꿈틀거림은 이미 1958년의 철도노조 파업 운동을 통해 나타났고, 그 모습은 1960년대의 학생운동과 독립노조운동을 통하여 표면화되었다.   1985년의 멕시코 대지진은 도시 사회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6년 국립대 등록금 인상을 골자로 한 교육개혁안은 근 20년간 잠들어 있던 학생운동을 다시 부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것은 급기야 198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중산층의 반란으로 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 3당으로 성장한 까르데나스의 민주혁명당(PRD)은 제도혁명당의 철권 독재지배에 저항하는 시민사회의 성장을 반영한 대표적인 정치적 사건이었다.   -멕시코에서 시민사회가 항상 폭발적인 계기를 통해 성장해 왔지만 독재체제를 굳힌 제도혁명당의 꼼수와 교묘한 통치술로 인해 그것이 단선적인 팽창으로만 나아가지 않았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민사회의 역량은 여전히 국가와 제도혁명당의 지배력에 밀려 때로는 파괴되었고, 때로는 타협이 강요되었다.-   

치아빠스의 농민반란도 이러한 시민사회의 성장과 후퇴의 흐름 속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독해를 통해 왜 치아빠스의 농민반란이 무장반란의 형태를 띠었는가 하는 점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치아빠스에서 사회운동이 강화된 시기는 대체로 발전모델의 전환기와 일치한다.   1980년대에 들어서 정부의 발전정책 기조는 수입대체산업에 기반을 둔 다수에게 호소력이 큰 민중주의적 접근 모델에서 수출과 대외개방에 초점을 둔 신자유주의 모델로 전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과정은 다양한 사회세력 사이의 투쟁과 충돌을 예견하고 있었다.   정부가 나름대로 신자유주의적 근대화 프로젝트를 점진적으로 추진해 가고 있었다면, 이에 비판적인 사회적 집단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대안적인 발전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1960-70년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도 이제 더 이상 국가의 주변에서 수동적으로 지배되는 대상이 아니라, 참여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주체로 조직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의 민주적 참여의식과 정치제도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큰 괴리가 가로놓여 있었다.   근대화와 함께 성장한 시민의식에 부응하는 정치제도의 근대화와 개혁은 결핍되었던 것이다.   시민사회의 반대세력을 체제내로 흡수하기 위한 소폭의 정치개혁이 있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의 이해갈등을 제도의 틀내로 흡수할 정치적 제도화는 여전히 미진했다.   제도혁명당의 지배체제는 여전히 난공불락이었고, 집권연장의 야욕과 권위주의화는 오히려 강화되어갔다.

   1960년대의 '멕시코 경제기적'과 함께 출현한 시민사회는 정치제도가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될 것을 요구하였다.   민주개혁에 대한 바람은  1968년 학생운동에서 출발하여, 독립노조운동이 제기했던 요구사항이었고, 나아가 1988년의 중산층의 선거반란에 이르기까지 줄곧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정권연장의 야욕의 불을 끌 수 없었던 제도혁명당 정부는 1988년 전국민의 투표 후에 선거 결과를 집계하던 중, 승산이 없는 불리한 결과가 나오자 급기야 개표를 진행하던 컴퓨트 시스템까지 꺼버리는 무리를 범하면서 체제의 유지를 기도하였다.   살리나스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시민들의 바람인 전면적인 정치개혁을 시도하기 보다는 권력유지의 차원에서 미봉책으로 일관하였다.   오히려 살리나스 독트린은 경제개혁을 미끼로 정치는,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몰아갔다.

   이런 점에서 치아빠스 원주민 봉기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정국에서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가장 급진적 표현이었다.   무장투쟁이란 사회적 갈등을 체제내로 흡수하여 해결할 수 없는 사회가 겪을 수 있는 정치참여의 한 방법으로, 제도화의 결핍에 대한 시민사회의 최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치아빠스주에서 그동안 빈발했던 농민들의 토지점거 운동이나, 최소한의 인간적 생활을 위한 요구투쟁에 주정부나 연방정부가 적절히 반응 했더라면 농민반란이 무장투쟁이란 극단적인 방식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치아빠스 반란은 지난 장기독재 체제의 행정부의 무능과 무응답에 대한 치아빠스 농민들의 사회운동의 억눌린 저항의 폭발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치아빠스에서의 사회운동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시점은 1970년에 마누엘 벨라스케스가 주지사로 당선되면서 시작되었다.   7만 명의 마야 원주민들은  이때부터 라깐돈 밀림을 토지 회복을 위한 투쟁의 무대로 삼고 지방정부와 대지주에 대항하였다.   토지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농민들은 수십번 관청으로 달려갔고, 때때로 토지를 점거하면서 데모를 하였다.   또 장장 1,106킬로미터나 되는 "멕시코시티 수도로의 긴 도보행진"도 수없이 감행하였는데, 이는 언론에 의해 "개미들의 행진(marcha de hormigas)"이라고 불러졌다.    독립농민조직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 였다.

   1974년에 최초로 치아빠스 인디오 원주민들이 밀림 속 비옥한 토지인 대지주 소유의 농장들을 습격하였으며 7명의 대지주를 마야 토속법에 따라 처형하였다.   이에 즉각 멕시코 군이 개입하였으며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Harvey 1994: 22-23).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977-82년까지 밀림 속 지형이 매우 험악하고 가파른 산악 지대에 웅거하며 계속해서 이 지역의 사회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국제 인권 보호단체인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오하하까와 치아빠스에서 인권유린 현상이 심각하게 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을 고발하였으나, 멕시코 정부는 한결같이 "근거가 없다"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엄청나게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알토스데 치아빠스(Altos de Chiapas)는  사실상 전쟁 상태에 처해 있었다.   멕시코의 권위있는 일간지의 하나인 '엑셀시오르'는, 1984년에 치아빠스에서 농민들과 대지주들이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서로 고발하고 있음을 보도하였다.   주정부도 멕시코의 아름다운 고원도시인 산 끄리스또발의 인디오들을 게릴라 그룹이라고 비난하였다.    그 전쟁에서 정부군과 인디오 반란 군들이 많이 회생되었지만, 정확한 숫자는 비밀리에 부쳐젔다.    1982-88년까지 민주적인 독립노조 교사운동도 활성화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1991년에 공유지의 사유화를 골자로 한, 헌법 제 27조의 개헌이 시작되었다.   치아빠스 민중들은 살리나스 행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토지개혁에서 더 이상 기댈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제 체제 내부에서 투쟁하기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치아빠스 사빠띠스타 민족해방군(EZIN)은 이러한 사회적 과정의 정치적 표현이 정점에 다다른 것이다.   

   다음에는 멕시코 사회운동이 전쟁 상황으로까지 확전된 뜰라뗄롤꼬 학생 운동의 진상과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봉기 개요를 더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임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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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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