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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빠스는 멕시코 전체 32개주(멕시코 시티 포함) 가운데에서 가장 가난한 주 중의 하나였다.   정부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그 당시(1994년 인구) 8천 200만 인구 가운데 2천 600만 명이 절대빈곤의 상태에 처해 있었고, 치아빠스 전체 인구(그 당시 약 350만)의 84.50%가  절대빈곤의 상태에 있었으며, 치아빠스 전체 인구의 30.12%가 문맹이었고, 63%가 초등 교육을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당시 치유가 가능한 질병으로 10년 간 사망한 원주민은 약 16만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 인구의 대부분은 그 당시 봉기가 일어난 5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당시 멕시코의 연간 일인당 국민소득은 4천 달러 수준이었다.   그런데 멕시코시의 평균소득은 8천 달러였던 데 반해 치아빠스주의 경우는 1천 달러에도 거의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치아빠스 원주민은 지독하게 가난하지만, 치아빠스 주가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은 아니다.   치아빠스에는 멕시코의 1/3의 생산량을 자랑하는 석유,가스,수력자원,우라늄,철,알루미늄,구리, 목재 등과 같은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멕시코의 전체 수력발전량의 50% 이상을 치아빠스주가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주 내부의 전력공급 사정은 멕시코에서 가장 낮다.   치아빠스의 석유와 천연가스는 전체 공급량의 31%와 47%를 각각 생산하며, 옥수수, 콩, 담배, 카카오 초콜릿 원료, 커피 수출의 60%이상, 바나나의 생산에서도 전국에서 3위권내에 위치한다.   비록 치아빠스의 우림지대가 수십 년간 계속 파괴되어 왔지만 아직도 멕시코내에서 목재 생산량은 두 번째이다.   이를 두고 미국의 역사학자인 토마스 벤자민은 "부유한 땅, 가난한 인디오 주민"이라고 표현했다(Benjamin 1989).   

치아빠스의 부는 주 바깥으로, 멕시코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치아빠스는 국제시장과 국내 기업인들의 요구에 춤추는 멕시코 정부의 '인디오들을 철저히 착취하는 내부식민지'라고 할 수 있었다.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한 이래 치아빠스는 주로 농업으로 특화된 발전경로를 걸어왔었다.   식민지 모국이 중시하는 금과 은이 나지 않았기에 당시 부왕청도 중심도로(camino real)를 닦지 않았다.   정복 이전 치아빠스의 주요한 농업생산 품목은 당시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에 공급하던 카카오와 면화, 그리고 자가소비용이었던 옥수수와 콩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면서 기존의 질서는 변하기 시작했다.   

  치아빠스에서 금과 은이 나지 않은 연유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이 지역은 다른 지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격리되어왔다.   광산의 부재로 산업은 저발전의 길을 걸었고, 대부분의 경제활동은 중심부를 향한 수출 위주의 농업활동에 집중되었다.   이 수출용 농업을 위해 당시에 가장 양질의 땅을 점유하고 있던 인디오 원주민을 그 땅에서 추방하는 과정이 시작되었었고, 동시에 인디오 원주민들은 지극한 최저임금의 노동력으로 전환되었다.

  식민지 시대에 경작된 주요 농작물은 바나나와 커피였고, 태평양 연안 지역에서는 목축업이 시작되었다.   16세기와 19세기 사이에 팽창하였던 목축업은 점차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와 목화로 대체하였다.   1821년경에 이르러 치아빠스에서의 전통적인 생계경제 활동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치아빠스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된 비옥한 토지의 사적 매입과  수탈 현상은 멕시코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과정의 일부를 구성한다.   

  1910년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전국토의 97%는 830명의 대농장주가, 전국토의 2%는 50만의 소농장주가 각각 소유하고 있었다.   겨우 나머지 1%만을 인디오 공동체(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하던)와 카톨릭교회가 겨우 공유하고 있었다.   이 당시 치아빠스에서 대부분의 부와 권력은 소수 가문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치아빠스의 대지주들은 인디오 노동력을 조직하여 중앙정부에 한편으로 저항하고 한편으로 타협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다.   멕시코의 다른 지역과 달리 1910년의 혁명은 치아빠스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치아빠스의 혁명은 해방과 사회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연방정부의 법령으로만 내려왔다.   대토지소유자들은 그들이 누린 이전 시대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혁명에 대해 저항함과 동시에 동맹정책을 구사하였다.   대지주들은 많은 돈을 정치자금으로 헌납하며 오브레곤 대통령과 동맹을 맺었고 이로 인해 대지주들의 기득권은 침해받지 않고 더욱 확고해졌다.   다시 말해 혁명 이후 30년간 치아빠스주의 토지소유 구조는 실제적으로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온존하였다.   혁명은 치아빠스를 스쳐갔을 뿐이었다.   새로운 농지개혁을 시도했던 까르데나스 정부도 겨우 몇 명의 외국인 대지주에게만 영향을 주었다.   치아빠스에 등록된 토지의 50% 이상이 이 지역의 2.6%에 해당하는 대지주의 손에 있었다(Reyes Ramos y Lopez Lara 1994:20-21).

  1940-82년 사이에 정부는 치아빠스에서 소토지 보유자를 양산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분활지의 증여 기간에 어떠한 대토지 보유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들은 대토지를 자기들의 형제나 친척에게 위장 분산시켜 문제를 해결했다.   분배된 것은 단지 유휴지 농토, 국유지,미개간 국유지 뿐이었다.   라깐돈 우림에 위치한 총 500만 헥타르는 다른 주에 있는 토호세력에게 분배되었다.   동시에 연방정부는 위장된 소토지 보유자들의 생산과 이윤증식에 필요한 신용대출까지 제공하였다.   정부는 또 이들에게 소규모 민병대와 보조 경찰을 운영하고 가축 절도를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치안의 권리까지 허용하였다.

  1940-70년 사이에 분배된 500만 헥타르 가운데서, 가장 비옥한 300만 이상의 토지는 협동조합으로 조직된 축산업자, 임업 개발자들에게 소유권이 돌아갔고 사실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무용지물인 나머지 200만 헥타르는 공유지 형태로 인디오 농민들에게 분배된 것이다.   1980년 대에는 전국에서 농지분배가 사실상 종결되었고, 기존의 대토지 소유자들이나, 친인척의 조합으로 결합된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은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라티푼디아로의 복귀'(relatifundizacion)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Melgar Bao 1994:24). 

  더구나 1960-82년 사이 치아빠스에는 전국 전력 수요의 50%를 공급하기 위하여 3개의 대규모 수력댐을 건설하였다.   이와 동시에 석유의 탐사와 추출도 시작되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엄청난 면적의 경작 가능한 국유지와 공동소유지를 몰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력공사나 석유공사는 피해를 입은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보상도 하지 않았다.   

  또 1988년 정부는 라깐돈 우림에 대한 새로운 보호법령을 공포하고,인디오 원주민들은 전통적으로 해 오던 '제초-화전' 방식을 통한 토지경작과 목축활동을 할 수 없게 하였다.   이에 우림지역에 늦게 정주한 원주민들은 생계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의 좌절감은 극에 달했다.   대규모 제재소가 자행하고 있는 우림의 파괴에 대한 책임을 밀쳐 두고, 오히려 생계유지를 위해 화전 경작을 일삼는 인디오 원주민들이 우림 파괴의 원흉인 것처럼 몰아부쳤다.   

  이런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치아빠스주의 경우 에히도나 농업공동체를 포괄하는 사회부문의 발달 수준은 다른 주에 비해 특히 열악한 수준이었다.   우선 에히도와 농업공동체의 96%가 빗물에 의존하는 천수답이니 관개설비는 차라리 없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의 20만 명이 되는 사회부문 성원이 5인 가족을 거느리고 있다고 추정하면 100만 명의 인구가 되는데, 이들이 차지하는 총면적은 겨우 313만 헥타르이다.   이 중에서 영농이 가능한 토지는 40.8%인 128만 헥타르에 지나지 않는다.   주된 경작물은 옥수수가 압도적임을 잘 알 수 있고 그 뒤에 커피가 뒤따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에히도 개혁이나 옥수수 시장의 개방이 치아빠스 사회부문에 미칠 충격은 의외로 엄청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원주민들의 농지 보유 상황은 굉장히 열악한 데 1헥타르 미만이 73%나 될 정도로 열악하고 4헥타르를 넘는 경우도 6.9%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조건 속에서 인디오 원주민 농민들이 농산물 시장을 개방한 뒤 밀려올 압력이나, 에히도 민영화를 통한 농업의 구조개혁의 여파를 견딜 수 있으리라 보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사빠띠스따 봉기가 일어난 라까돈 지역은 정글 우림지역 특유의 문제점과 인구급증이라는 두 변수가 합쳐지면서 가장 극심한 어려운 조건을 안게 되었다.   1960년대 이래 분배된 라깐돈 지역의 평균 배분량은 개인 농가당 지극히 척박한 미개간지 50헥타르 정도나 된다.   

  옥토에서 배제되었고, 급증하는 인구를 부양할 방도가 없는 치아빠스 농민들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는 다른 요소는 이 지역 농민들의 값싼 노동력 보다도 더 싼 임금으로 고용되는 이웃 과테말라 난민 노동력이다.   대규모 커피농장으로 몰려드는 일시 노동자들은 보통 15,000-30,000명  수준이었다.   이들은 치아빠스 고지대 출신 노동자들의 임금을 더 낮게 유지하는 데 이용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1980년대 초 과테말라에서 '더러운 전쟁'을 치를 당시 유입된 8만 명 수준의 난민들도 가뜩이나 어려운 이 곳의 노동시장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Hernandez Sergio 1994:3).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들을 요약해 보면, 치아빠스에는 근대화도 혁명도 농지개혁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치아빠스주는 멕시코가 편입된다고 하는 북미세계가 아니라, 이미 제 4세계의 문턱에 있었고 중미에 속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멕시코 전체가 치아빠스"라는 것은 아니었다.   '포보스(Forbes)'와 '포츈(Fortune)'지에 자주 소개되는 멕시코 재벌들에게는 멕시코가 치아빠스일 수가 없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득을 볼 수 있는 북부 지역의 마낄라도라(보세 가공 아셈브리공단) 공단이나 애그리비지니스에게도 멕시코가 치아빠스일 수 없다.   그러나 멕시코인의 50%는 적어도 어떤 형태로든지 신자유주의 모델의 희생자로 '치아빠스인'일 수 있다.

  1988년에 이미 토마스 벤자민은 치아빠스주의 상태가 게릴라 전쟁의 직전에 와 있다고 진단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다른 사람들도 치아빠스의 인디오 주민들이 극심한 기아 상태에서 굶어 죽느냐 아니면 총을 들고 죽느냐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경고하였었다.   다음 장에서는 치아빠스 농민반란의 구조적 계기가 되는 농업의 위기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치아빠스 인디오 원주민에게 '사망진단서'라는 사빠띠스따들의 주장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J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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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2
07:3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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