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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아빠스에서 원주민의 무장반란은 처음이 아니고, 아주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지난 500년간의 역사를 짚어볼 때 치아빠스에서 원주민의 반란은 여러 번 있었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반란으로는 쩰탈(Tzeltal) 반란(1712)과 차물라(Chamula) 반란(1869)이 있다.   이러한 반란들은 비록 유토피아적 과거를 향한 혁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지닌 혁명적 잠재력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역사에 기록된 원주민들의 저항은 단지 가난 때문에 일어난 소요가 아니라, 자기 나라를 침공하여 핍박과 만행을 서슴치않는 식민자들과 그 식민정책에 대항한 문화적 긍지와 자주 독립(자율적 정부) 의식에서 나온 저항의 결과이기도 했다.

    치아빠스 인디오 원주민 반란은 본국을 침탈한 서구문명에 대항해 최소한의 권리와 그들의 문명이 생존하기 위해 저항한 기록이다.   원주민 반란은 지난 500년간 치아빠스에 강요된 서구문명의 근대화 사업 설계가 공동체의 삶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악화시켜 버렸기 때문에 야기된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다(Bonfil 1981, 1994).    

   이러한 해석은 원주민의 공동체 문명이 그들에게 강요된 서구의 근대화 모델보다 훨씬 풍요로운 삶의 형태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치아빠스 봉기가 발생했다고 본다.   더구나 하나의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모든 것을 녹여내는 세계화 과정 속에서 급속하게 파급되는 자유시장경제의 법칙은 전통적인 농촌사회를 붕괴시킬 뿐 아니라, 원주민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마저 해체시킨다는 점에서 이들의 위기의식은 심각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지난 200년간의 멕시코 역사를 통해 서구적 '현대성'에 대한 원주민의 문명적 투쟁사를 해독하려는 기예르모 본필(Bonfil)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1810년의 멕시코 독립전쟁은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계몽적 전제주의에 의해 진행된 근대화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   그후 100년 후 1910년에 일어난 멕시코 혁명은 멕시코 경제발전사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시기인 뽀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iaz) 독재체제(1877-1910)의 근대화 노력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결과였다.   35년간에 걸친 장기 독재 체제를 굳힌 뽀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은 멕시코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화려한 정치. 경제적 구호를 남발하면서 서구화의 과정을 '질서와 진보'라는 슬로건 아래 독재자들의 공통점인 집권의 연장을 위해 인기 주의적 경제 정책을 독재적 방식으로 추진하였다.   뽀르피리오 시대에 멕시코는 고속도로,철도,은행 등 당시 최첨단의 과학기술과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정부측 지식인들 중, 과학에 의하여 얻어지는 지식의 총체만이 참된 지식이라는 실증주의 경향의 정부관리집단이 주도한 근대화 프로젝트를 통해 멕시코는 그야말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수출은 급증하였고 선진국의 고급 상품들이 유명 백화점을 가득 메웠다.   1905년 일본과 영국의 중간상에 속아 유카탄 지역 멕시코 농장에 도착한 한국의 최초 이민도 이러한 멕시코 근대화 역사의 일부인 것 처럼, 심지어 아시아의 값싼 노동력을 수입하여 인력기근에 허덕이던 멕시코 노동시장의 요구를 채우기도 하였다.

   당시 구미언론들은 뽀르피리오 독재체제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나라' 멕시코를 '평화적이고 문명적인 나라'로 전환시켰다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화 정책은 인구의 다수인 인디오 원주민의 희생을 강요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당시 뽀르피리오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디오 문화의 희생도 선진국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비용의 일부라고 합리화하였다.   인디오 공동체의 공유지는 대지주인 아시엔다에 병합되었고, 인디오 원주민의 생활상은 식민시대보다 더 형편없이 열악해졌다.   북부의 야끼(Yaqui) 종족에 대한 잔인한 전쟁은 경작지를 요구하는 농민반란을 억압하는, 근대화란 신념에 기초한 길고 긴 학살극의 시작일 뿐이였다.   치아빠스의 주지사 엔리께 끄렐(Enrique Creel)은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0만 명의 유럽인들은 기술, 기업정신, 좋은 예절, 진보를 가져오나 인디오들로부터는 오직 무기력, 증오, 그리고 배신밖에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에 죽여도 괜찮다"고 까지 말했다(Bonfil 1981: 156).    

   뽀르피리오 대통령 시대에 멕시코는 한국 이민자들을 포함 약 1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수입하였다.   비록 갈색머리와 푸른 눈의 순수 백인들이 온 것은 아니나 이탈리아와 쿠바로부터 비슷한 유럽 출신 노동력이 유입되었다.    뽀르피리오 디아스 정부의 이러한 이민유입 정책은 당시 인구구성에서 다수였던 인디오 원주민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이라는 해석도 있다.   1810년 당시 멕시코 인구구성에서 인디오 원주민은 전체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였다.   한마디로 인종의 위계와 차별에 뿌리박은 인종주의적 편견이 이민유입의 동기로 이민정책에 깊숙히 내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인디오 원주민에 대한 원천적 부정은 개혁기와 멕시코 혁명 이후 탄생한 정부들이 추진한 국민국가 형성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혁명 이후 지식인들이 멕시코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만든 '멕시코의 철학'(filosofia de lo mexicano)은 '인디오적인 것'을 부정한 결과로 나타나는 메스티조를 '우주적 인종'(La raza cosmica)으로 과장하였다.   강력한 메시아적 다윈주의가 내포된 이 철학은 혼혈인 메스티조를 인디오 인종을 대체할 새로운 인종으로 이상화하였다(Vasconcelos 1979, 1925).   이 철학에 따르면 새로운 인간은 서구의 인종적 특징을 취득하기 위하여 탈원주민화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인디오 세계는 지나간 과거의 세계이며 광신과 후진의 유산밖에 남겨 놓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멕시코 혁명의 지식인이자 교육부장관을 지낸 바 있는 호세 바스꼰셀로스는 이 사상을 멕시코 혁명정부의 공식 이데올로기로 승화시켰다.   이로써 혁명정부의 근대화 프로젝트에도 역시 진보를 위해서라면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잉여' 집단을 희생할 필요가 있다는 사상이 유입되었다.   이들도 인디오 문화를 희생하는 것은 선진국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비용이라고 냉정하게 계산하였다.  

   그러나 원주민은 당연히 이러한 논리에 저항하였다.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문화와 현대성은 전혀 다른 체계이다.   이들에게 현대성은 곧 관용과 다양성이라는 설명은 역사적 현실에서 입증되지않는 추상적인 가치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성에 대한 원주민들의 구체적 체험은 소외와 배제 그리고 추방의 기억 외에는 없는 것이다.   진보를 향한 근대적 프로젝트란 이들에게 있어서 빈곤을 생산하는 기제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원주민들은 근대화 프로젝트와 폭력적인 만남을 경험하면서 자동적으로 '과거 회귀의 신화'(mito de vuelta)를 수용하게 되었고, 이 신화는 강력한 사회적 동원 능력을 지닌 저항의식의 기반이 되었다(Torres1994)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디오 원주민 봉기를 사회경제적 맥락과 완전히 독립된 문화적 현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원주민의 운동도 기본적으로 농민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오 공동체는 농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농민운동의
한 구성요소로 간주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이, 농지개혁을 요구하는 300만 명의 농민 가운데 35%가 인디오 원주민들의 요구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디오 공동체의 투쟁은 농민의 요구투쟁과 일치하며, 그것의 주된 목표는 삶의 터전인 토지이다.   토지를 중심으로 한 농민과 인디오 투쟁에서 이 두 집단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부의 경직된 태도와 부딪히면서 인디오 원주민운동의 일부는 정치화되었고 급진화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70년대 초부터 발생한 수많은 인디오 원주민 운동에서 우리는 점차 급진화되고 요구와 수준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과정들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이들은 농민운동의 기본 요구사항인 경작지 외에도 천연자원의 보존, 생산과정에 대한 지원책, 교육과 문화, 그리고 농업노동자의 노조결성 등을 요구하였다(Folres, Pare y Sarmiento 1988: 106-201).  다시말해 1970년 대 이후의 원주민 운동은 농민의 일상적. 계급적 요구만을 표출한 것이 아니라 농촌사회의 구조적 위기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들이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원주민운동은 사회구조의 변혁을 이끈 혁명적 저항운동으로 진화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 대통령이 멕시코의 경제와 근대화의 산업 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35년간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의 여파가 멕시코 국민들을 좌절과 슬픔 속으로 매몰시켜 나가는 원흉이되었다.   부정부패가 온 나라를 병들게 했으며 특히 인디오 농민들의 삶은 고통과 황폐의 바다에 표류하게되는 엄청난 회생의 파도 속에서 신음하는 결과를 초래케했다.   드디어 독립 100주년이었던 1910년, 결국 멕시코 혁명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좋은 의견이나 질문이 있으시면 lawsouthbay@hotmail.com으로 보내 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제임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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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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