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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멕시코 학생 데모대 대학살 사건의 개요.

  

1968년 10월 2일은, 멕시코의 역사상 가장 슬픈 날이다.

 

라틴아메리카 역사상 처음으로 멕시코에서 개최되는 올림픽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던 1968년에 멕시코시티는 7월 하순부터 데모대의 물결로 가득차게 된다.   중등교육의 현장에서 빚어진 폭력적인 학생탄압이 발단이 된 데모대는 점차 멕시코의 정치, 사회, 경제적, 문화적 불평등과 위기를 반영하며 전국적으로 확산이 된다.   경찰과 군인들이 데모대를 무력진압하고, 고등학교, 대학교 등을 점거하며, 마른 장작에 불길이 번지듯이 데모대는 걷잡을 수 없이 더욱 거세진다.   그리고 이는 멕시코시티의 북부지역에 위치한 Tlatelolco(뜰랄뗄롤꼬)의 Plaza de las Tres Culturas(쁠라사 데 라스 뜨레스 꿀뚜라스, 삼문화 광장)에서 발생한 10월 2일의 학생 데모대 대학살로 귀결된다.   이는 몇 달간에 걸친 투쟁의 결과로,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68년

7월 23일: 직업고등학교와 멕시코 국립대학교 부속 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의 오랫동안 지속된 실랑이가 싸움으로 발전, 고위 자제가 적을 둔 부속고등학교 편을 든 경찰은 이들의 싸움을 오히려 부추겨, 직업고등학교에 처들어가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 학교 여선생을 심하게 구타하여 실명케하였다.


7월 26일: 전국 기술고등학교 학생연합(Tecnicos,이하 FNET)주도아래 시내에서 항의 데모, 쿠바 혁명군의 몬카다 병영 공격 기념집회를 개최하던 전국민주주의 학생 연합(CNED)주도 아래 대학생들과 합세한 약 5000명의 데모대는 멕시코 시티 중심부에 위치한 중앙헌법 광장인 소깔로(Zocalo)에 집결하여 데모를 하지만, 경찰은 총기를 사용하여 무력으로 진압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경찰들이 공산당 중앙 사무소에 침입하여 기관지를 압수하고,당원들을 검거했다.


7월 30일: FNET와 같은 친정부단체 및 학생들 축출, 회생자보상, 무력진압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데모대가 멕시코 전지역으로 확산된다.  이에 경전차 등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멕시코 국립 대학과 주요 고등학교에 무장으로 진입하여 데모대를 진압하면서 400여명이 다치고, 천 여명을 검거했다.


7월 31일-8월 1일: 멕시코 국립대학교 Javier Barros Sierra(하비에르 바로스 씨에라) 총장은 군대의 학교 불법 진입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였는데 이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일련의 사태와 정부의 무자비한 폭력성과 비민주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8월 2일: 정당, 사회단체 등을 배제한 순수 학생, 특히 고등학생들로 구성된 전국파업위원회(El Consejo Nacional de Huelga)가 결성되었고, 8월 4일에는 공식적으로 정치범 석방, 경찰 및 군인 철수, 무력진압 책임 규명 및 관련자 처벌, 희생자 보상, 집회금지에 대한 형법 145조 폐지 등 6개 조항의 해결을 촉구했다.


8월 8일: 멕시코국립대학교, 사범대학교, 멕시코 대학교, 이베로 아메리카 대학교 등이 전국파업위원회에 가입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을 문화파괴주의자, 공산주의자(종공산당몰이),등으로 비판 왕따시키는 친정부에 빙의된 여당의원들을 공식적으로 부정 반박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활동, 주 40시간 노동, 전반적인 농업 개혁 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저항 운동은 점차 시날로아,바하 칼리포니아, 따바스꼬, 베라꾸르즈 등지로 확산되었다.


8월 13일: 학생, 노동자, 농민 등의 약 200,000명이 멕시코 중앙 광장인 소깔로에 집결하여 자기 들이 요구한 사항에 대한 정부의 신속한 이행을 촉구했다.


8월 15일: 전국대학교협의회가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를 지지하였고, 이와 더불어 예술가 단체 등도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운동이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8월 21일: 학생운동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토론회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생방송되었다.


8월 22일: 루이스 에체베리아(Luis Echeverria) 내무부 장관이 대화를 제의하고, 전국파업위원회는 공개 대화를 전제로 이를 받아들인다.


8월 27일: 소깔로 중앙광장에 약 400,000명이 모여, 전국파업위원회의 요구조건에 대한 정부의 성실한 이행을 촉구하고, 9월 1일 소깔로 광장에서 정부측과 진실된 대화를 요구하였다.


8월 28일: 새벽에 무장한 군인, 경찰 등은 소깔로 광장에 집결해 있던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이후로부터 정부는 학생들의 모든 집회를 무력으로 봉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학생들은 다시 오후에 소깔로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경찰은 즉시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탱크와 착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은 학생들을 향하여 찌르고 총을 쏘면서 강제 해산을 하던 중 급기야  몇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9월 1일:대통령은 교서를 통해 "학생데모의 요구사항을 수용할 수 없고, 대학의 자율성 침해와 그 어떤 부정도 단연코 없었다"고

왜곡 은폐하였으며, 올림픽 개최를 위해서 어떤 방해와 책동도 강경하게 대응할 것임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9월 2일: 전국 학생 데모대는 "정부와는 더 이상 대화를 시도하지 않겠고, 앞으로 어떠한 핍박과 총검이 그들을 향할 지라도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9월 13일: 소깔로 광장에 약 250,000명이 모인 데모대는 입에 붕대를 붙인채 침묵시위를 했다.


9월 15일: 멕시코 국립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여 멕시코 독립 기념식을 개최하고 다시 데모를 했다.


9월 18일: 탱크 등을 앞세운 군대가 멕시코 국립대학교에 진입하여 학생, 교수,직원 등을 강제 해산시키고, 약 1,500명을 검거했다.  멕시코 국립대학교 총장은 모든 학생들에게 "대학의 도덕성을 수호하고 학생으로서의 가장 가치있는 책임을 방기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으나, 멕시코 상.하원과 여당은 대학 총장의 무능력을 비판하고, 정부를 적극 지지할 것을 맹세했다.


9월 21일: 뜰랄뗄로꼬에서 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다시 기습적인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들이 포위하고 강제 해산시켰다.


9월 22일: 뜰랄뗄롤꼬 삼문화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었고, 확실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그룹이 근처에 위치한 직업고등학교 건물을 파괴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교직원들이 심하게 다치고, 576명이 검거되었으며, 시내 여러 곳에서 365명이 검거되었다.   데모는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심해져갔고, 몬떼레이, 꾸에르나바까, 유까딴, 바하 칼리포니아,치우와와,등지로 확산되어갔다.   의사, 노동자, 언론인 등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9월 23일: 멕시코 국립대학교 바로스 시에라 총장은 "대학의 자율성이 농락 당했다"고 강력히 항의하며 대학협의회에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에 멕시코 국립대학교 교수노조는 만약 협의회가 총장의 사퇴를 승인하면, 7 천명의 교수들도 총사퇴를 감행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시내 곳곳에서도 경찰과의 충돌이 잦아졌고, 군대는 뜰랄뗄롤꼬의 한 직업고등학교를 점령하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9월 24일: 멕시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데모는 전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미국 뉴욕, 콜롬비아, 과테말라, 벨리스 온두라스 등지에서도 멕시컨 교포들의 집회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기다가 중앙아메리카 5 개국은 구스따보 디아스 오르다스(Gustavo Diaz Ordaz) 멕시코 대통령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9월 25일: 멕시코 대학협의회는 총장의 사퇴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9월 26일: 핀란드, 파나마, 페루, 칠레, 프랑스 등은 멕시코 세계 올림픽에 불참할 것을 통보했다.


9월 27일: 총학생연합회는 고등학교 및 모든 대학교를 점거하고 있는 경찰 및 군대의 철수, 검거자의 즉각적인 석방, 무력진압 중단을 정부에 촉구하였다.  한편 멕시코 공산당은 내정 간섭 혐의로 주멕시코 미국 대사 풀턴 프리만(Fulton Freeman)을 고발했다.


9월 30일: CNH는 올림픽 보이코트를 하지 않을 것이라며,  6개 요구 사항에 대한 정부의 신속한 이행을 촉구했다.


10월 1일: 멕시코 국립대학 본부에서 두 번의 회의가 열렸고, 학생들은 정부의 흡족한 해결 노력 없이는 학교로 복귀하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10월 2일 뜰랄뗄롤고  삼문화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10월 2일: 그리고 잔학한 군중 학살의 만행으로 수 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무력 진압 개요(槪要)


1968년 10월 2일, 멕시코 시민들은 무장한 군인들의 대학교 무력 점거에 대한 항의 표시로 붉은 카네이션꽃을 들고 거리 행진을 감행했다.  그리고 시민 단체 대표인 라울 알바레스 가린(Raul Alvarez Garin)과 그외 6 명의 시민들이 그동안의 희생자와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대검찰청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저녁에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주축이된 데모대들이 삼문화 광장으로 집결했다.  그곳에는 연인,친구,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부들, 어린 학생들도 다수 있었다.   이 평화스러운 데모대를 향하여 무장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서 삼문화 광장은 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멕시코 정부는 멕시코에서 치러질 세계 올림픽 대회를 평화롭게 개최하기 위해서 이미 조직적으로 계획한 듯 삼문화 광장을 가득 메운 수 십 만명의 데모대를 향하여 무력진압을 감행했다.   무장한 경찰과 전차와 탱크를 앞세운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삼문화 광장에 집결한 데모대가 단 한 명도 빠져 나갈 수 없도록 삥 둘러 삼 중으로 포위하였던 것이다.

제 1 포위망은 올림픽 경비대가 담당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데모대 주동자들을 검거하기 위하여 데모대와 똑 같은 시민들로 위장하였다.

 그리고 일부는 광장에 위치한 치우와와(Chihuahua) 빌딩 주위에서 비밀스럽게 최전선의 포위망을 구축했다.  삼문화 광장을 둘러싼 제 2 포위망은 전차,탱크를 앞세운 군인들이 담당하였다.  그리고 혼란한 틈을 타서 빠져 도망칠 군중들을 검거하기 위해서

광장 주위와 아파트 단지의 외곽로도 겹겹으로 제 3 포위망을 구축했다.   10,000의 경찰 병력과 수 많은 군인들을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헬리콥터에서 쏘아 올린 조명탄을 신호로 조직적인 무력 진압이 시작된 것이다.

먼저, 올림픽 경비대가 총을 쏘기 시작했고, 이어 군인들은 데모대와 인근 건물위에서 데모를 하는 시민들을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총격은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데모하는 것을 구경만 하는 시민들에게까지도 총을 쏘았다고 한다.   멕시코 정부에서 의도적으로 희생된 숫자를 은폐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다고 하나 약 380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그 진압 작전에서 약 6000 명 이상이 검거되었고 이 중에서 2000 명 이상이 구속되었다.

잔혹한 진압은 다음날 새벽까지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인근 아파트에 숨어들었던 데모대를 집집마다 수색하여 검거하였고, 어느 누구도 삼문화 광장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 적십자사의 환자 치료와 구호활동까지도 금지시켰다고 한다.   정부가 내세운 올림픽대회를 위한 평화는 수 많은 사람들의 죽음의 흐느낌 속에서 강제되었다.   정부는 삼문화 광장에서 벌어진 유혈사태는 먼저 극렬분자들과 쿠바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촉발된 폭동이라고 왜곡했고 은폐, 축소 마무리하기 위해 언론을 장악했다.   데모 주동자들은 모두 구속 되었고, 그 후 학생들도 대학으로 복귀하면서 타다 남은 힘 없는 연기처럼 데모도 점차 뜸해지면서, 대학살의 진상은 세계올림픽의 함성 속으로 묻혀져 갔다.


학생 운동이 엄청난 회생으로 일단락 막을 내렸지만, 그 후에도 지식인들은 계속해서 부정과 폐쇄적인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의 정도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멕시코 정부도 독단적 결정을 지양하면서 억압 보다는 외형적으로라도 협력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 후 정치범 석방, 노동당 결성 등 보다 유연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학생 운동이 가져온 그런 정치개혁은 제한된 것이었지만, 제도권적 정치 영역이 향상 확대되었고 개방된 것 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대학살은 멕시코 '양심의 위기'의 상징이라고 할 만큼 최근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베일 속에 감추어진 채 잠들고 있다.   단지 멕시코인들의 집단적 기억으로 존속해 내려오면서, 그 때 흘린 피가 너무도 안타깝기에, 정녕 그들의 영혼들이 허무로 돌아 가지 않도록 멕시코를 위해 새롭게 새생명으로 잉태되길 소원해 볼 뿐이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1997년 여소야대의 멕시코 국회가 탄생하면서, 국회는 68년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회는 1968년 대학살과 관련이 있는 루이스 에체베리아(1970-76 재임) 전(前) 멕시코 대통령도 포함된 18명에 대하여 조사를 했다.  에체베리아는 1968년 당시 내무부 장관으로 대학살의 직접적인 책임자인데, 그는 위원회에서 학생들은 무장하지 않았으며, 정부는 학생들의 데모대의 지도부를 해체하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만행을 저질렀음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비밀 문서는 공개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책임자 규명 및 처벌은 미완의 상태로 남겨졌다.     그러나 80년 동안 일당독재를 하며 자신들이 저지른 1968년 사건을 은폐해 온 제도혁명당(Partido Revolucionario Institucional:PRI) 정권이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행동당(PAN) 비센테 폭스)에 의해 무너졌다(모든 자료 Luis Hernandez 1998:27-180).  이 학생 운동의 연장이 곧 1994년 치아빠스 인디오 원주민의 반란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다음에는 그 인디오 반란에 대해서 기고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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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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