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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빠띠스따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호르헤 까스따네다는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게릴라 운동과 비교해 볼 때, 콜롬비아의 게릴라 단체인 M-19와 비슷한 '무장한 개혁주의'(reformismo armado)로 성격지운다.  사실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이 1월 6일 발표한 선언문에 따르면, 사빠띠스따들은 대중의 민주적 요구를 존중하며 전국적인 참여와 지지를 호소하였다.  사실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요구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것은 그 당시 멕시코 대통령이었던 살리나스의 사퇴였으나 이것 또한 선거관리를 시민사회에 위임하라는, 정치개혁을 위한 압력수단에 불과했다.  사빠띠스따들의 힘은 그들 요구의 합리적 성격에 있다.  세사르 로메로가 지적하였듯이 그들의 급진주의는 개혁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점은 토지, 미국.카나다 그리고 멕시코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정치에 대한 마르꼬스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빠띠스따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멕시코에서 민주주의가 확장되는 것이며, 다양한 이해와 의견이 표현될 수 있는 다원주의적 공간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들은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어떠한 의도도 가지지 않고 있었으며, 더욱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파괴와 같은 마르크-레닌주의적 요구와도 거리가 멀다.  

  그 대신에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최소한의 생존권과 일상생활의 문제이다.  전통적인 게릴라 운동이 제기하는 '혁명적 권력의 장악' 또는 '대안적 정권의 수립'과 같은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치아빠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일련의 효과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빠띠스따의 요구사항을 보면 치아빠스의 인디오 원주민 공동체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사회경제적 성격의 권리 회복이 주를 이룬다.

  맨처음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정부측 언론과 지식인의 분석은 이 운동이 사회적 기반이 없는 외부의 '직업적 전문가의 행위'라고 단정하였다.  이들은 조금 지나자 이 운동을 치아빠스의 소수 인디오 원주민의 '종족 반란'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사빠띠스따의 사회적 기반을 단순히 종족 범주로 가두기가 쉽지 않음을 이내 알 수 있다.

  치아빠스 지역 연구의 전문가인 안토니오 가르시아 데 레온(Antonio Garcia de Leon)은 사빠띠스따의 사회적 기반으로 도시의 비공식부문에 종사하는 빈민청년계층을 지적하였다.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이 단순히 소수 인디오 원주민으로만 구성된 것으로 보는 해석은 인디오 원주민과 메스티조 사이의 동맹의 가능성을 부정하려는 배타적 인종주의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사빠띠스따들은 인종적으로 다원주의적 기반과, 정치적으로 민주적 기반 위에서 국민적 헤게모니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점은 사빠띠스따 운동 세력의 형성과정에서도 보여진다.  민족 해방군의 봉기는 거의 10 년에 걸친 준비기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한 지도자는 이탈리아 일간지와 가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들의 조직은 1968 년 멕시코 학생운동의 야만적인 무자비한 학살 이후 비로소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우리들은 게릴라를 형성하였고, 지역공동체의 지원없이 산악지대를 전전하였다.  마을의 주민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도시에서 대중을 상대로 정치활동을 했고 많은 지원을 획득하게 되었다.(Reygadas y Gomez Coord; 43)

  사빠띠스따들은 테러주의 또는 포코주의적(foquismo) 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민족해방군은 사회적. 정치적. 군사적 과정의 결과였다.  이미 1978 년부터 치아빠스의 라깐돈 밀림에는 무장그룹이 종종 출몰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1978-81년 사이에 험준한 밀림 산악 지대에 은신했던 인디오들이 이미 산발적으로 소수의 게릴라 운동을 전개했으며, 멕시코 군당국은 이들의 확산을 막으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번번히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이 당시부터 인디오 원주민 공동체가 이들 그룹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던 사회적 기반의 일부로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사빠띠스따 해방군은 오래 전부터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폭력적 정부 전복 사례는 114회에 이른다.  혁명 당시 멕시코 혁명이 세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한 것은 정부의 지능적인 언론장악과 함께 독재정권의 계획적인 은폐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멕시코 혁명은 그런 모든 억압에 목숨 걸고 대항한 인디오들의 처절한 저항의 물결로 나타났다.  독재와 제국 체제에 고통 받는 순수한 농민들이 주체로 뭉쳐진 해방군으로 거듭 태어났던 것이다.  

  꼰체이로는 해방군이 폭넓은 사회적 기반을 확보한 이유를, 투쟁의 전위대 개념을 철저히 부정한다는 점에서 찿는다.(Concheiro 1994;14-15).   해방군은 소수에 의한 모험적 행동주의 노선을 거부하고 집단적 지도노선을 취했다.  그들은 멕시코의 민주적 변화가 해방군만의 배타적인 과제가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수많은 대중과 조직의 과제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들은 해방군이 전국적 운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겸허히 인정했다.  이 점이야말로 오늘날 치아빠스의 사빠띠스따들이 멕시코 시민사회의 단체들과 정당들로부터 연대의식과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요인이라 하겠다.

  민족해방군의 정치적 성격은 멕시코 역사에 나타난 다른 운동들과 비교할 때 좀더 분명해질 수 있다.  소뗄로(Adrian Sotelo)교수는 수 십년 전 멕시코 혁명 당시의 사빠띠스따 운동과 민족해방군(EZLN) 사이에는 이데올로기적 연속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수 십년 전 모렐로스(Morelos)의 구사빠띠스따들도  -과거의 체제나 전통으로 되돌아 가려는- 복고주의(復古主義)적 권리를 옹호하였다.  즉 생존과 자치, 토지와 민중의 공동체적 삶에 요구되는 권리를 방어하였다.  그러나 두 사빠띠스따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다.  구사빠띠스따가 모렐로스의 농민을 중심으로 봉기하였다면, 신사빠띠스따들은 치아빠스주의 마야 문명권 농민을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구사빠띠스따들의 통합요인이 농업 생산자였다면, 신사빠띠스따에게 있어서는 농민이라는 조건 외에 종족 성격이 부가된다.

  다음으로 1970 년대 멕시코에 있었던 게릴라 운동과 비교 해 보자, 라울 베니떼스에 의하면, 치아빠스의 무장 투쟁은 1970 년대 게릴라 운동과는 달리, 정치적. 군사적 측면에서 전혀 새로운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민족해방군(EZLN)은 시대착오적이거나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계적 반복이 아니다.  1970 년대 게레로(Guerrero)주의 게릴라 운동이 '진지전'을 전개할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던 반면, 치아빠스주의 민족해방군들은 일시에 5 개의 주요도시를 짧은 시간에 점령하는 기동전의 능력을 지녔으며, 그 당시 지난 4 년간의 협상 테이블에서 얼굴을 맞대면서, 해방구와 군사력을 유지하는 진지전에도 정략적 군사적 치밀한 능력을 입증했다.  특히 인터넷을 동원한 선전전은 이미 세계여론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정도로 성과가 컸다.   

  이러한 운동의 조직적. 전략적. 전술적 측면은 1980 년대의 중미 게릴라 운동과 비교해도 차이가 있다.  1970-80 년대의 중미의 게릴라 운동체들은 '파라분도 마르띠 민족해방전선'(FMLN)이나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FSLN)처럼, 주변의 사회운동을 연계시킨 '전선'(Frente) 형태로 조직되었다면,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주변 운동과의 직접적인 연결 없이 바로 '군대'(ejercito)로 조직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Benites 1994;27).

  이제 마지막으로 페루의 천년왕국적 성격의 무장게릴라 운동체인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와 비교하면서 민족해방군(EZLN)의 정치적 성격을 규명해 보기로 하자.  두 운동은 봉기의 '윤리적' 목표가 사회적 불평등의 폐지에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또 두 운동 모두 지역적 격차 문제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점보다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더 두드러진다.

  먼저 권력과 정치에 대한 입장의 차이부터 살펴보자.  센데로 루미노소는 사회의 전반적 변혁을 위해 '낡은 국가'의 파괴를 목표로 하며 종국적으로 공산주의를 수립하고자 한다.  반면 민족해방군(EZLN)은 비록 멕시코시의 장악을 운동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부정으로 당선되는 멕시코 대통령 선거의 공명정대한 선거를 보장하는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시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해방군은 좁게는 치아빠스, 넓게는 멕시코 사회의 진보적 개혁이란 최소강령에 만족한다면, 센데로 루미노소는 운동의 목표를 구국가 타파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이라는 최대강령에다 설정한다. 

  정치적 동맹과 같은 연대의 문제에 있어서도 민족해방군의 경우는 지역적, 종족적 성격의 문제와 전국적 문제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계급주의를 넘어선다.  반면 센데로 루미노소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도 아래 "동력으로서 지목된 농민에 의해 " 지지받는 당의 지도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계급주의적 운동이다.  게다가 센데로 루미노소의 담화에는 전선(frente)이 지닌 중요성 때문에 동맹은 무장투쟁의 초기부터 허약할 수밖에 없다.  또 인디오 문제는 그들의 담화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아야꾸초의 지역 문제나 인디오 문제는 계급주의적, 군사주의적 담화의 과잉 속에서 소멸되어 버린다.

  또 다른 차이점은 공명 선거의 원칙과 민주적 제도 그리고 언론에 대한 입장에서 나타난다.  센데로 루미노소에 따르면, 페루에 있어서 모든 선거란 부르주아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 대중을 억압하는 지도자들을 갱신하기 위한 제도에 불과하다.  이와 달리 치아빠스 민족해방군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공명 정대한 선거를 요구한다.  즉 원칙이 바로 선,공명정대한 선거를  사회변화의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언론과 대중매체에 대한 센데로 루미노소의 입장은 거부 일변도이다.  이들은 "대중과의 직접적 교신"이 근본적이라고 규정하는 자못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반면 민족해방군은 공개적인 활동은 물론, 비밀회의의 구체적인 과정이나 결과들을 대중매체에 공표하고, 이것을 전국적으로 홍보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민족해방군의 최대의 승리는 군사적인 것보다 정치적 선전의 측면에 있다는 데 대부분의 정치 분석은 일치하고 있다.(Flores 1994;24).   특히 인터넷을 활용한 선전활동과 홍보는 저항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새로운 매체의 잠재력을 유호적절하게 이용한 선전과 폭로전은 이미 4 대륙에 광범한 연대조직을 구축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들을 멕시코 국가의 무력진압으로부터  보호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21 세기형 혁명의 방법에 새로운 전범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6 장에서, 마지막 결론으로  멕시코에서 발발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혁명이 러시아 혁명보다 더 이른 20 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빠띠스따 반란의 전개 과정과 후속 상항, 주요 인물과 선언문, 사빠띠스따 반란의 전모의 그림이 그려지게 될 것이다. 

 

제임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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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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