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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멕시코 반란을 재 조명해 보면서.

 

   "불쌍한 멕시코, 그대는 하나님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미국과는 너무도 가까이 있구나!" 널리 알려져 유명해진 이 말은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전제적 독재권력을 휘둘렀던 멕시코의 대통령인 뽀르피리오 디아스가 한 말이다.   이 불쌍한 멕시코를 필자가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아마 미국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Aron Copland)의 '엘 살론 멕시코(El Salon Mexico)란 소품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솔로 트럼펫으로 은은히 흘러 나오는 멕시코 민요의 리듬을 들으면서  '아, 이게 멕시코 풍이구나! 하고 약간의 호기심과 친근감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 작곡가의 현대적인 감각으로 작곡된 이 곡이 멕시코의 리듬을 미국식으로 박제화한 작품이라고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1985년 2월 멕시코 시티의 까페와 거리에서 마리아치(거리의 악사)의 노래를 듣고 나서였다.

   필자가 멕시코 반란 또는 혁명에 대해서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도 아마 할리우드의 영화를 통해서 처음 주어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약간 게걸스럽고, 야만스럽게 묘사된 도적 무리들로 등장하는 북부의 농민군, 산적 우두머리로 묘사된 빤초 비야,  "야만스런 멕시코(Mexico barbaro)"  아마 이런 것들이 멕시코 반란에 대해 접한 최초의 인상이었다.   그러나 27년 겨울 뜰랄뗄로꼬에 운집하여 소깔로 광장으로 가는 멕시코 시티의 데모대 무리를 보고, 데모대의 맨 앞장에 펼쳐진 사빠따와 체 게바라의 대형 걸게의 그림을 보고,  이들의 얼굴 속에 벤 땀과 힘찬 결의를 읽으면서 멕시코 반란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이 광장은 46년 전 학생 데모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수 많은 인명을 살상한 그 유서깊은 뜰랄뗄로꼬 광장이었다.

   35년 전 학생들이 요구한 슬로건은  "1917년 헌법의 적용, 표현의 자유, 노동조합의 자유,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 등이었고, 이에 대한 집권당인 제도혁명당과 그 정부의 대답은 꽃다운 학생들을 향한 무차별 사격이었다.   민족 고유의 인권과 생명존중 정신이 말살된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피의 광풍이 휘몰아쳤던 바로 그 장소였던 것이다.   친여권 인사로 멕시코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시인인 옥따비오 빠스가 정부의 방침에 항의하여 인도 대사직을 사임할 정도로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박물관에서나 거리 이름에서나 여기저기 혁명의 '수사'는 난무하는데 실제로 눈에 드러나는 것은 여기 저기 헤진 곳을 깁고 덧붙인 남루한 옷을 걸친 슬픈 눈빛의 인디오 꼬마 아이들, 거리를 방황하는 인디오 이농 가족들, 매연으로 시꺼멓게 그을린 건물들이었다.   제도혁명당이 선거 때마다 내뱉은 수많은 국민들과의 약속들, 멕시코인들이 가장 소망했던 온갖 좋은 말들을 다 쏟아부은 감언이설로 갖은 수사(修辭)를 구사했던  '말'들, 그러나 계속되는 암울한 현실, 그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빛, 이 모든 것들이 '반란의 유산'이란 말인가?     혁명을 제도화시켜 끊임없는 개혁을 통해 자유.진보.평등의 세상을 건설하겠다던 꿈은 과연 소진되고 말았던가?

   26년 전 다시 방문하게 된 멕시코 시티는 대통령 선거 개표 시비로 한창 달아올라 있었다.    제도혁명당의 대통령 후보인 살리나스와 꾸아우떼목 까르데나스가 서로 당선자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정계나 언론계에서는 뜨거운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더구나 개표과정에서 컴퓨트 고장 소동으로 선거위원회의 발표는 제도혁명당 살리나스 후보가 약간의 차이로 승리했다고  했지만 애시당초 그 발표를 믿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멕시코 시티에서 꾸아떼목 까르데나스의 득표율을 볼 때 까르데나스의 승리가 분명해 지자 아예 컴퓨트 시스템을 올스탑시켜 버린 것이다.   

   키신저는 '멕시코 리포트'를 통해 미국이 대규모 차관으로 긴급수혈을 해야 멕시코의 엉망인 정치적 위기가 타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미행정부에 '조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당시의 현실을 볼 때 지난 반세기 동안 정치적 안정을 누려온 제도혁명당의 헤게모니는 미증유의 위기에 빠진 것이 틀림 없었다.   

1917-20년 혁명의 유산으로 만들어진 정치.사회 질서는 혁명의 소용돌이를 거치는 과정에서 커다란 변혁기를  경험한 것만은 분명하다.   

비단 멕시코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근현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아래로부터 진보적인 개혁의 흐름을 만들어 냈던 멕시코 반란/혁명은  그 당시에만 움직이는 모습이 표착되었을 뿐 일관적으로 진행되는 잠재력은 힘을 잃고 말았다. 

따라서 더 이상 제도혁명당과 그 정부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들은 멕시코 사회의 위기에는 새로운 대안이 요구되고 있으며, 그것은 사회의 진보적인 개조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역사적 블록'의 형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제도혁명당은 '전민중의 단합'에 기초한 '멕시코 혁명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러한 위기도 전국민의 연대로 극복해 갈 것을 천명한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 노동자.사용자. 정부는 '연대협약(Pacto de Solidaridad)을 맺고 협조해 갈 것을 강조한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개혁의 잠재력은 아직도 소진되지 않았다.   멕시코 혁명은 이런 맥락에서 여전히 정부 여당과 야권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고, 또 그 나름대로 멕시코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작금에도 멕시코 혁명은 서점의 가판대 위에서, 리베라(Diego Rivera)와 시께이로스(Siqueiros)의 벽화 그림 위에서 대통령궁의 위엄 속에서 아직도 그 위광(威光)을 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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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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